Jun 14, 2013

커다란 거미를 못 본척 했던 얼굴로

조민희, <......>, 145.4x89.4cm, Acrylic on Canvas, 2012


1
새벽 2시가 넘은 시간에 문자메세지 도착 알림음이 울린다. '이 시간에 올 문자가 없는데.' <LTE52 요금제 기본제공 데이터가 1021MB 남았습니다.> 발신번호 114로 오는 문자는 늘 친절하고 정확하다. 아이패드를 켰다. 와이파이 연결이 안된다. '왜 안되지?' 사방이 조용하다. 사방이 조용하니 나의 물음이 시끄러운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물음이 시끄러운 것은 오해다. 오해야'

하릴없이 부엌에 나가 삶아진 감자 한 알을 먹었다. 감자가 맛있게 잘 삶아져 있었다. 이 새벽에 먹기에는 너무 맛있게 잘 삶아진 감자였다. 내가 감자 한 알을 먹으니, 유리그릇에는 감자 한 알 만큼의 빈 자리가 생겼다. 빈 자리를 한번 물끄러미 보았다. 감자가 아직 따뜻해서 유리그릇에 김이 서려있다. 감자 한 알 만큼의 빈 자리가 남았다.

싱크대에 감자를 찍어먹던 포크를 넣어두고 몇 걸음 걸어가 라울이를 쓰다듬었다. 조금만 쓰다듬었는데 라울이가 그르렁 소리를 낸다. 조금만 쓰다듬는다. 라울이 눈이 촉촉하다. 라울이는 눈이 예쁜 파란색이고 눈썹이 길다. 눈이 예쁜 파란색이고 눈썹이 긴 라울이를 조금만 쓰다듬고 방에 들어와 앉는다.

한 시간 전. 집에 오려고 길에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는데, 대로변 쓰레기 더미에서 커다란 거미가 움직였다. 커다란 거미 같은 사람이었다. 옷 가지 아래로 나온 다리가 무척 가늘고 위태로웠다. 허리는 굽어 있었고 장면이 아주 검었다. 커다란 거미 같은 사람이 쓰레기 더미위로 몸을 기울여 무언가를 신중히 찾고 있었다. 그이가 그렇게 몸을 기울이고 있으니 커다란 거미가 사라진 듯 했다.

눈을 돌리니 검은색 승용차 하나가 내 앞에 멈춰 서 있었다. 운전석에 앉은 남자는 얼굴이 두툼하고 머리가 꽤 길었다. 얼굴에 패인 칼자국 만큼 눈빛이 험악했다. 남자가 날 한번 보고 나의 뒷 풍경을 물끄러미 보았다. 1초, 2초, 3초. 그 눈빛을 잊을 수 없다. 그 남자는 무얼 위해 차를 멈춰세웠을까. 1초, 2초, 3초. 몸이 굳어졌다. 싸늘한 기운은 말이 없다. 잠시 후 검은색 승용차가 떠났다.

눈을 돌렸다. 사라진 줄 알았던 커다란 거미가 쓰레기 더미 위로 몸을 세워 다시 부스럭 거리며 움직임을 시작했다. 부스럭 소리가 작아서, 신경이 곤두섰다. 커다란 거미는 검었고, 쓰레기 더미 또한 검었다. 쓰레기 더미가 나뒹구는 도로도 검고 택시의 불빛도 검었다. 술에 취하지 않은 사람에게 그 시간의 풍경은 더할나위없이 생경하고 검은 것이었다.

2
새벽 두 시가 넘어 방바닥에 털썩 앉아 114의 친절한 안내 문자를 받고, 아이패드를 열었다 닫고, 맛있게 삶아진 감자 한 알을 먹고, 눈이 예쁜 라울이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눈을 몇 번 깜빡 거리고, 잠시 집 앞 골목에 나갔다. 하늘이 짙푸른색이야. 그래서 나는 지금이 한 새벽 네 시는 된 줄 알았다.

인기척이 느껴져서 깜짝 놀라 옆을 보니 옆집 아저씨가 자기 집 앞에 서 있있다. 자동차 두 대가 세워져있고, 그 가운데께 쯤에 서서, 글쎄, 아저씨는 그 때 담배를 태우고 있었던가. 나는 가로등 불빛을 보고 선명한 전깃줄을 보고 날파리가 푸드덕 거리는 것을 보았다. 그 때 나는 무얼 생각하고 있었더라. 잠이 안 온다고 생각하고 있었나. 기다리지 않는 것을 기다린다고 생각했었던가.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 같으면서 무언가 많은 걸 생각하고 있었고, 그 때의 나의 얼굴은 아무런 색도 띄질 않았다. 아무런 색도 띄지 않은 그 얼굴이 피부께 아래로 무언가를 은폐하고 있었다.

'오늘은 그런 날이다.'

걸음을 돌리다 아저씨가 자기집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얼굴이 익숙치 않은 아저씨의, 더 익숙치 않은 뒷 모습이 가슴을 눌렀다. 아저씨는 기다리지 않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을까. 아저씨는 한참동안 그 집앞에 서서 문을 열지 못했다. 문을 열지 못하는 아저씨의 뒷 모습이 아까 그 커다란 거미 만큼이나 검었다. 나는 커다란 거미를 못 본 척 했던 얼굴로, 아저씨의 검은 뒷 모습을 뒤로 하고 우리집 문을 열었다. 나는 커다란 거미를 못 본척 했던 얼굴로, 뜨거운 물로 몸을 녹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