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 27, 2012

<크고, 멋져보이고, 아름답다>


  불꽃놀이 축제가 있던 날. 많은 사람들이 불꽃놀이를 보러 여의도에 모였다. 지하철은 숨쉴 틈 없이 사람으로 미어졌고, 겨우 빠져나온 출구에서도 사람들은 북적였다. 인상을 찌푸리고 불편해하면서도, 그들은 빛나는 불꽃을 보기위해 모였다. 같은 날, 같은 시간, 일시적 기업의 사원들은 비장한 사명감을 가지고 역시 여의도에 모였다. 이들은 높은 건물의 옥상에 올라갔고 저 먼 곳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탕 / 탕 / 탕. 소리도 없고 빛도 없고 화약 냄새도 나지 않았다. 어떠한 것도 박살나지 않았고 아무도 사살되지 않았다. 여전히 한강변의 불꽃은 크고 성대하게 펑 / 펑 / 펑 - 터지고 있었다. 이들은 진중한 눈빛으로 총을 들고 서 있었다.

  사회는 개성 있는 개인을 원하고 자유로운 생활방식을 권장하지만 사실 그 안에서 개인은 찾아볼 수 없다. 의식적으로 이미지화 돼버린 이 시대의 ‘청춘’들은 아프니까 청춘이기에 묵묵히 여러 가지 것들에 순응된다. 우리는 그럴싸한 기업에 취직하기를 유언적/무언적으로 요구받고, 수도 없이 많은 이력서를 써대며 희망과 도전이라는 단어로 덧발려진다. ‘왜’라는 물음은 이곳에 없다. 이러한 질서를 움직이는 거대한 체제는 개인이 개인으로 튀어나오지 않기를 원하고 ‘문화’라는 것으로 손쉽게 하나가 되는 것을 원하는듯하다. 이 여의도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불꽃놀이도 이러한 정책의 연장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크고, 멋져 보이고, 아름답다>. 비록 순식간에 상상을 초월하는 단위의 세금이 공중에 흩뿌려지고, 말도 못하게 더러운 쓰레기들이 남더라도, <크고, 멋져 보이고, 아름답다>. 우리는 무언가 빈 포화상태에 있지만 누구도 쉬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여의도에 모인 일시적 기업의 사원들은 기존 체제에 가린 개인이라 할 수 있다. 발산되지 못한 개인의 욕망들은 가슴에 갑갑하게도 뭉쳐있다. 순전한 자의로 모인 이들은, 사실 어떠한 빌미가 필요하여 모였는지도 모르겠다. 가슴에 갑갑하게 뭉쳐진 욕망들을 발산할 빌미. 여의도나, 여의도 이전의 역삼에서 일시적 기업 사원으로 활동했던 행위는 일종의 발산구로 느껴졌다. 늘 말하고 싶었지만 말할 줄 몰랐던/모른 척 했던/말할 수 없던 그런 표현들에 당위성을 마련해주는 것 같았다. 그 속에 들어가 어떠한 제스쳐를 취하고 다시 유유히 걸어 나오는 마음은 촌스러울만큼 의식적이었다. 비장한 사명감은 공간을 새롭게 보게 했고, 그 공간을 둘러싼 체제를 보게 했으며, 그럼으로 그동안의 질서를 벗어던질 수도 있게 했다. 비록 그것이 문자자체로 ‘일시적’인 것에 그칠지라도, 움직인 자의 마음엔 오래 남아질 ‘무엇’이었다. 그래서 더욱 커다란 ‘무엇’.

  불꽃놀이는 <크고, 멋져 보이고, 아름다웠다>. 그것이 그날 불꽃놀이에 대한 단편적인 감흥이었고, 딱, 그 정도였다.


(위 글은 갤러리 보다 컨템포러리 에서 열렸던 차지량 작가의 세번째 개인전, <일시적 기업>(2011.11.11-11.17) 도록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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