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13, 2013

그런 기억이야 모른척 덮어두면 그만이다

김성수, <Melancholy>, Oil&Acrylic on Canvas, 150x150cm, 2010-11


여자는 평소에 잘 마시지 않던 녹차를 시켜 한 모금 마셨다. 오랜만에 맛보아서인지 고소한 향이 입에 가득했다. 날이 점점 여름을 향해 가는데 여자는 때 아닌 감기에 걸렸다. 그리고 몸살이 심해져 내리 이틀을 앓았다. 어제와 그제는 등과 어깨쪽이 계속 쑤시더니 오늘은 허벅지와 종아리가 쑤신다. 덩달아 눈도 아프다. 자꾸 콧물이 나 목소리가 좀 맹해졌고 머리가 뎅뎅 한다. 별 한 것도 없이 몸이 계속 피곤하다. 집중도 되지 않을 뿐더러 만사가 귀찮으면서도, 왜 이렇게 사소한 것에 자꾸 눈이 가는지. 자꾸만 쓸데없는 것들에 정신이 팔려버린다. 창가쪽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이 전에 알던 누군가를 닮았다고 생각돼 자꾸 쳐다보게 되는 식으로. 그리고 마침내 고개를 돌린 그의 얼굴을 보고는 아닌 것을 알게되고 그다지 중요한 일도 아닌 그런식의 싱거운 결말들을 스쳐지난다.

아까 저녁을 먹던 곳에서 병으로 된 오렌지주스의 뚜껑을 돌려 따다 예전에 그곳에서 함께 식사를 했던 사람이 떠올랐다. 고개를 돌려 그들이 함께 앉았던 자리를 보고 여자는 잠시 멍해졌다. 그때가 언제였더라. 서로가 끈질기게 다정함을 발휘하던 그때에는 둘이 나란히 벽에 등을 대고 앉아, 테이블 앞에서 식사를 했다. 온 몸으로 귀여움을 받던 여자는 한껏 기분이 들떴었지. 애정의 확신을 가진 눈은 어느 때보다도 빛이 났다. 같이 먹던 음식은 별 볼일 없는 메뉴였지만 그 날의 기분만큼 맛이 있었고 시덥잖은 농담이 즐거웠다. 둘만의 언어가 뿌듯했던 오후. 잠시 흩뿌리는 비가 오고 하늘이 회빛이 됐던 날이다. '무슨 날이 이렇게 흐려?' 그렇게 괜히 툴툴거릴 수 있는 사람이 있어 여자는 흐린 날씨가 싫지 않았다. 빈 공간에 그러한 장면과 대화와 향들이 겹쳐졌다.

다시 돌아온 공간에는 혼자 식사를 하며 책을 읽는 여자가 있었다. 경박스러운 유행곡이 연달아 플레이 되고 종업원들은 서로 수다를 떠느라 정신이 없다. 그때는 가게 유리창 너머가 밝았는데 지금은 아주 어둠이네. 그 사이 창 너머 가게는 업종을 바꾸었고 한적한 거리에는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다. 어쨌거나 여자는 혼자 있는 것에 익숙했고 그것이 서글프진 않았지만 잠시 지난 시간을 더듬고 있자니, 그때가 그립기 시작했다. 스스로의 그리움을 알게되는 것은 왠지 쓸쓸한 일이다. 분명 그 사람이 그리운 것은 아닌데. 어쩌면 여자는 애정의 확신을 온 몸으로 느끼던 시간들이 그리운지도 모르겠다. 코를 한번 훌쩍이는 사이에 머리가 다시 울리고 여자는 감정에 흔들리지 말자고 생각한다. 그런 기억이야 모른척 덮어두면 그만이다. 그런데, 그 생각 덕에 애꿎은 마음이 더 연약해진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