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15, 2011

작업노트, 2010

 
 
I. 사소하지만 매력적인 풍경
 
 
1. 정물작업의 시작 
 
처음 작업의 시작은 주변의 정물들을 바라보는 것에서 부터 시작하였다. 실기실 한켠에 굴러다니는 분무기, 물감접시, 의자, 우산 등. 아무런 의미도 갖고 있지 않은 듯한, 그러한 평범한 정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대단하고 커다란 것, 왠지 중요할 것만 같은 것들, 스펙타클한 것들로 세계는 비대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스펙타클의 이면에 가려진,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충실히 존재하는 정물들이 그 어떤 거대한 것보다도 그득하게 내 마음을 채웠다. 주목받지 못한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해낸다는 것. 그러한 점들이 나를 더욱 끌리게 하였다. 어쩌면 정물들을 관찰하는 과정에서 나는 나 자신과 정물들을 동일시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대상에 대한 연민은 곧 감정표현에 대한 욕구로 발현되었다.
   
작음의 세계 속에서 꿈꾸고 생각하려 하자마자, 모든 것은 커진다. 무한소 현상들은 우주적 차원으로 전환한다. 나는 이 작음의 세계 속에서 커다란 세계를 발견하고 싶어졌고, 이를 화폭에 담아보기로 하였다.
   
 
2. 재료기법연구
   
처음 정물 작업을 시작하던 시기는 2010년 1월 즈음이었다. 아직 개인작업이 손에 익지 않은 시기였고, 재료에 대한 친숙함도 부족한 상태였기 때문에, 재료기법연구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이 시기의 작업은 크기가 매우 작았다. 가로 세로 각 10~15cm의 판을 만들어 여러 기법들을 시도하였다.큰 작업으로 곧바로 들어가는 것보단 재료에 대한 감을 익히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였기에 할 수 있는 한 많은 양의 작업을 하였다.
   
종이도 한 가지 종류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옥당지, 순지, 장지 등 여러 종류의 종이를 사용했다. 종이를 바꾸어가며 얇기에 따른 먹의 번짐, 흡수력 등을 연구하였다. 비단작업과 벽화작업도 함께 진행하였는데, 단단한 느낌의 흙판 보다는 수묵의 느낌이 나의 작업과 더욱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아, 종이 작업으로만 작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보이는 그대로를 완벽하게 재현해내기보다는 대상이 가진 사려 깊은 느낌들을 살려내고 싶었다. 그래서 붓이 아니라 나무젓가락으로 형태를 그리고, 진채가 아닌 수묵의 방식을 택하였다. 색을 입히는 것에 있어서는 전채와 배채를 번갈아 하는 방식을 택하였는데, 전채가 주지 못하는 색의 깊이감을 배채를 이용하여 보완할 수 있었다.
   
이 시기의 정물 작업들은 후에 큰 작업으로 완성된다. 작은 조각들을 모아 새롭게 배치하는 과정에서 색의 어울림이나 먹의 번짐 정도, 분위기의 통일성 등을 많이 고려하였다. 개인적으로는 이 시기의 기초적인 작업들이 마지막 졸업 작품으로 오기까지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II. ‘의자’에 투영되는 자아
 
 1. 의자작업의 시작 
 
어느 날, 주인 없이 홀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의자를 보았다. 그 순간의 감흥을 떨쳐낼 수 없어, 그 모습 그대로를 그리기 시작했다. 또렷한 형체가 아니라 부스러지는 듯, 쓰러지는 듯 의자가 그려졌다. 초반의 정물작업은 의자로 대상이 좁혀지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의자 연작이 시작된다. 의자를 그리면서는 초반 정물작업을 할 때보다 대상에 대한 감정이입이 더 깊어졌다.
   
의자를 바라보고 있으면, 꼭 의자가 나 같았고, 나를 둘러싼 사람들 같았다.
 
 
1) 의자의 상징성  
 
의자는 ‘앉기 위해 만들어진 물체’라는 목적성을 지닌다. 의자는 항상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누군가를 기다린다. 자신에게 기댈 누군가가 없으면, 의자는 스스로의 존재를 잃어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의자는 사람이 없으면 불완전한 존재가 된다. 이러한 불완전함, 무엇인가를 기다려야하는 외로움이 내가 의자를 바라보는 대부분의 시각이다.
   
초반 작업에서는, 여럿의 의자가 놓이고 그 중 하나의 의자만이 다리가 부서지거나 온전한 상태가 아닌 의자의 모습을 표현했다. 혹은 두개의 의자가 있고 홀로 떨어진 하나의 의자가 등장하였다. 이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흔들리는 나 자신의 자아를 상징한다. 온전한 타인의 모습과, 온전하지 못한 나 자신. 무엇인가가 결여되어 있거나 외로움을 느끼고 있는 나의 감정 상태가 의자를 통해 반영되었다.
   
 
2) 관계에 대한 고민, 자아의 표현  
 
앞서 말했듯 나에게 의자는 관계에 대한 고민이며, 자아의 표현 이었다. 이 당시 임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 관계론에 대한 글을 많이 읽었는데, 그의 자아에 대한 서술이 내 작업을 고독이나 아픔으로 파고들게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임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자아는 존재의 익명적 있음을 지배한다는 것, 자기는 자아로 곧장 되돌아온다는 것, 자아는 자기 자신에 의해 방해받는다는 것, 그리하여 유물론자의 물질성과 내재의 고독에 사로잡힌다는 것, 노동과 아픔과 고통가운데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의 짐을 짊어진다는 것. … 일치의 불가능성, 부적합성, 이것은 단순히 부정적 개념이 아니라 시간의 통시성 안에 주어진 불일치의 현상가운데서 의미를 가지는 개념이다. 시간은 이 불일치가 언제나 있음을 뜻하고 갈증과 기다림의 관계가 언제나 있음을 뜻한다"고 이야기 했다.
 
자아와 존재에 대한 고민은 더욱 더 서글픈 정서로 표현되어 지고, 이 시기의 나의 작업은 가장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를 풍겨낸다.
   
 
2. 내적 언어
 
 
의자 작업을 시작하면서 시각적으로 새롭게 등장한 표현 방식에는 ‘글’이 있었다. 기존 작업들의 바탕이 단순한 색으로 이루어 졌다면, 이 시기 부터는 글이 바탕을 대신한다.
   
1) 예민한 감정의 발화
   
나의 예민한 감정의 발화는 타인에게 쉽게 동의를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상징적 의미에서의 나의 울음소리는, 홀로 일어서지 못하는 자의 외침으로 작용했다. 이를 알게 된 언젠가 부터 밖으로 쏟아내지 못하고 쌓아둘 수밖에 없는 글들이 생겨났다. 이에 나는 화폭을 빌어 한 줄씩 글을 써 내려 갔다.
   
이 글들은 외부로 표현되지 못했던 내적 언어로서, 글의 형태는 알아볼 수 없다. 외부로 글의 형태가 보여지기는 하나, 글의 내용을 해독할 수는 없다. 이것은 나 자신이 감정의 해소로서 화면을 이용하며, 표현 이후에도 마음상태에 대해서는 명료하게 드러내지 않으려고 함을 보여준다.
  
 
2) 우울하고 낮은 정서의 표현
   
나의 작업은 주로 우울하고 낮은 정서를 담아낸다. 화면을 통해서 해소되지 못한 내부의 감정들을 풀어내는 편이다. 작업에서 표현되는 감정은 작업을 풀어낼 때마다 조금씩은 다르나, 보통은 안정감의 부재와 우울의 정서를 기조로 한다. 정확히 안정감이 어디서부터 부재하는지, 더불어 딸려 오는 불안감과 우울함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으나, 이들은 언제나 나의 가장 낮은 곳에서 존재해왔다.
   
나의 작업에서 ‘글’은 모든 표현의 기초가 되어지는 것으로서 이러한 낮은 정서를 반영한다. 글은 정확한 형태로 보여지지는 않으나, 함께 들어가는 바탕의 색이나, 물감의 흘러내림이 감정표현에 힘을 실어 준다.
 
 
 
Ⅲ.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습관적 행위
 
 
1. 종이학의 상징성
 
종이나 티슈를 보면 무의식적으로 종이학을 접고는 한다. 내가 접고 버린 종이학을 다 세어본다면 아마 천마리는 족히 넘을 것이다. 종이학을 천마리 접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들 하던데. 사실 그동안의 종이학들은 어떠한 소망이나 믿음에 의한 것이기 보다는 습관에 가까운 것이었다.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행위였으며, 의도적인 희망을 품고 움직이는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스스로가 그 희망을 ‘믿는다’기 보다는, 의도적으로 희망을 ‘만드는’편에 가까웠다.
   
작품의 제목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습관적 행위>는 이러한 습관을 바탕으로 붙혀지게 되었다. 종이학을 접는 행위와, 생각이 나는 대로 내뱉어 온 수많은 글들. 실생활에서의 그러한 습관들을 화폭을 통해서도 보여지게 된다.
 
   
2. 감정의 표현, 그리고 치유
 
 
1) 불안감의 표출 
 
평소의 나는 불안감에 항상 시달려왔다. 관계에 대한 불안과 미래에 대한 불안, 스스로에 대한 상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러한 불안으로 마음은 항상 불안정하였고 무엇이든 그러한 불안감을 떨쳐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빈 화폭을 마주하고 있자면 늘 불안한 마음들이 올라왔다. ‘무엇을 그릴까’로 시작된 물음은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로 옮겨갔다. 나에 대해 생각하고 있자면 나의 마음 상태를 마주하게 되었고, 그것들은 해소되어야만 하였다. 
 
앞서 서술하였듯, 나의 작업은 감정의 표현이 주가 된다. 이성적인 재현과는 정반대의 노선에 서있기 때문에 미리 밑그림을 그린다거나 하지 않고, 순간순간 감정에 따라 즉흥적으로 풀어낸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가 스스로에 대한 치유로서 작용한다.
   
작업은 종이에 전채와 배채를 번갈아가며 여러 겹의 색을 칠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이때의 색은 앞서 말했듯 즉흥적으로 선택되는데, 색을 입히는 것에서 부터 내적인 감정의 표현이 이루어진다.  
 
밑색이 완성되고 나면 그 위에 콘테로 글을 쓴다. 글의 내용은 주로, 외부로 전달되지 못하는 나 자신의 언어이다. 화면이 텍스트로 다 채워지고 나면 그 위에 종이학이 드로잉 된다. 종이학은 부스러지는 형태로 나타나 나 자신을 상징하기도 하고, 희망이나 소망을 갈구하는 마음을 상징하기도 한다.
 
   
2) 루이스 부르주아Louies Bourgeois 의 ‘고통과 치유’
   
루이스 부르주아는 나의 작업에 많은 영향을 준 작가라 할 수 있다. 루이스 부르주아의 작품(처음 내가 보았던 여덟 번째 밀실 작품을 포함한, 실제적으로 또는 인터넷을 통해 간접적으로 보았던 모든 작품을 말한다.)을 감상하는 것은 그녀의 아픔을 알게 되는 간접적 경험이면서, 동시에 작품을 매개로 나의 아픈 기억을 꺼내보게 되는 개인적 경험이었다.
계속 해서 오랜 시간 묻어두었던 나의 아픔은 작품으로 하여금 나와 대면하게 되었고, 그렇게 대면하게 된 나의 아픔은 스스로 조금씩 위로받고 보듬어졌다. 슬플 때 슬픈 음악을 들으면 밝은 음악을 들을 때보다 기분이 더 나아질 때가 있는 것처럼, 나는 작품을 통하여 너 혼자만 그렇게 아픈 것은 아니었다고, 누구나 그렇게 아픈 기억이 있는 거라고. 조용히 위로를 받고는 했다. 내가 이렇게 다른 작품들에서보다 그녀의 작품에서 더욱 각별히 이러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그녀와 내가 가지는 개인적인 연관성 때문일지도 모른다.
   
루이스 부르주아는 자신의 작업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고통이라는 주제가 바로 내 업이다. 절망, 좌절, 괴로움에 어떤 의미와 형태를 부여함이다. 내 몸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어떤 형태를 부여 한다. 고통이란 형식주의의 몸값이라고 할까. 고통의 존재를 부인 할 수는 없다. 어떤 치유나 관용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을 직시하고 거기에 대한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그 고통은 제거 할수도, 사라지게 할 수도, 억압 할수도 없다. 그들은 항상 남아 있는 것이다. 내 작품<cell>시리즈는 여러 형태의 고통을 대변 한다. 육체적, 정신적, 지적, 감정적, 심리적 고통이다. 언제 심리적인 것이 육체적으로, 그리고 다시 심리적으로 발전 되는지, 고통은 어떤 상황에서도 시작될 수도 있고 어느 방향으로도 발전해갈 수 있는 끊임없는 싸이클 이다.’
   
윗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녀는 자신의 고통을 소재로 작품을 했다. 이것은 있는 그대로 작품에 담아지는데 때로는 적나라하게 바로 드러나기도 하고, 때로는 한 꺼풀 쌓여져 조용히 자리 잡기도 한다.
   
‘육체적인 고통은 현실 속에서 거부될 수 없다. 나는 어떤 약이나 변명도 제안하지 않는다. 나는 단지 그 것을 바라보고 이야기 할 뿐이다. 나는 내가 고통을 제거하고 억제하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나는 그것을 사라지게 할 수 없다. 고통은 여기에 머문다.’
 
‘예술가는 사실, 그가 온전한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이며 자신의 고통을 떠맡을 수 있는 사람이다’
   
고통에 대한 그녀의 여러 이야기가 있듯, 그녀에게 고통이란 매우 각별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고통을 실물화 시키면서 다시금 원점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 단계씩 발전된 정신적 성장에 이르고 있다. 그녀는 고통을 묻어두는 것이 아니라 용기 있게 그것과 직면하고 작업 하는 과정에서 내면적인 치유를 이룬다.
   
꾸미는 것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를 표현해 내는 솔직함. 자신의 내면에서부터 오는 이야기. 그리고 이야기를 통한 내적인 치유. 나는 루이스 부르주아를 보면서 작가는 솔직히 자신의 이야기를 작품에 담아내야 하는 것이라고, 그러한 진정성이 굉장히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 또한 그녀가 표현해왔던 방식으로 고통을 승화시키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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