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 24, 2012

방치된 애정

언제였더라 한 이년전쯤? 스테들러와 비슷한 필기감의, 그보다 절반가량의 저렴한 가격을 지닌 헥사플러스펜을 무척이나 애용한적이 있다. 그 중에서도 연회색과 진회색을 가장 많이 사용했었는데 이유는 연필과 비슷한 색감을 지니면서 뭉겨져 지워지거나 번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검정색펜은 어딘가 단호한 감이 있어 싫었다. 너무 진했고 그로인해 나의 모든 글씨가 단호해보였으며 숨기고 싶은 글들마저 튀어올라와 마음이 불편했다. 고작 펜 하나를 쓰면서 회색의 그 두가지 톤으로 나는 힘을 달리하고 역할설정을 했었다.

헥사플러스펜의 특성상 어느정도 쓰다보면 심이 뭉그러지기에, 핫트랙스에 가면 한번에 여러개씩 펜을 사들이곤 했다. 한동안 연필색같은 그것들로 드로잉도 많이 하고 그랬는데 한번은 이 펜들을 다 쓸때까지 열심히 하겠노
라는 다짐으로 펜을 왕창, 아주 왕창 사들인 적이 있다. 결국 나는 그 많은 펜들을 다 쓰지 못했다. 나의 앞선 마음과 들뜬 가슴을 게으른 나의 손은 따라잡을 수가 없었기에. 아직도 그 펜들은 책상 옆 투명한 플라스틱컵에 이리저리 담겨있다. 색도 뒤죽박죽 여러가지 것들이 정신없이 꽂혀있는데 이걸 보고있으면 그 때의 마음들이 떠오른다.

그 때는 이 펜보다 좋은 펜은 없을거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꼭 항상 여분의 것을 마련했으며 그 여분의 것을 바라보며 마음의 편안함을 느꼈다. 다른 것은 안된다고 못박아두고 기어코 한가지 것만을 고수하는 쓸데없는 강박이 있어 더 없이 욕심을 부리던 때다. 욕심들이 결국은 여분의 여분을 만들어냈고 예상대로, 그렇게 고집하던 그것들은 어느 날 방치되고 만다. 방치된 애정의 산물을 난 (언제그랬냐는듯이)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모른척했다.

따지고 보면 그런과정으로 방치된 애정의 산물들이 하나 둘이 아니다. 물성으로 보자면야 별거 아니어보이는 저렴한 펜 하나가 그 예지만, 만져지지 않는 무수한 것들이 <방치된 애정>의 범주안에 속해 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참으로 간사한 것이다. 나는 무엇으로 '이 애정은 변하지 않으리라'며 나의 마음을 그리 확신했던걸까. 오늘에야 참 오랜만에 이 펜을 바라본다. 나의 애정은 여전히 방치되어 있으나 나의 저 편의 기억을 환기시켜주는 존재에 감사의 마음을 보내본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