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몸의 사유>展을 보기 위해 오랜만에 소마미술관을 찾았다. 소마미술관은 다른 미술관을 찾을 때와는 조금 다르다. 공원 안에 있어서 그런걸까. 미술관에 간다기보다 피크닉을 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전시장은 올림픽공원 내에 자리하고 있는데 복잡한 도시와 떨어져 있는 한적함이 마음을 더욱 편안하게 해준다. 한참 날씨가 좋은 가을이라 기분이 더 맑았다. 몽촌토성역 1번 출구로 나와 천천히 걷다 보면 소마미술관을 만날 수 있다. 다른 전시도 그렇지만 마음이 조급하면 무언가 담기가 어렵다. 산책하듯 여유롭게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 새 미술관 앞이다. 주변의 나무들과 조용한 풍경들이 매력적이다.
소마미술관 앞에 있는 유명한 세자르의 <엄지손가락>. 서울올림픽 당시 출품된 이 작품은 당시 재료비만 1억 3천, 운반에만 2천이 지출되었다고 한다. 엄청난 덩치의 이 엄지손가락은 지문과 손가락 주름 하나하나의 묘사력이 대단한 작품이다. 우리 나라 말고 여섯 군데에 이 작품이 있다고 하는데 언젠가는 꼭 다른 나라에서도 이 작품을 만나보고 싶다.

현재 소마미술관에서는 <몸의 사유 Thoughts on Body>라는 제목으로 전시가 진행되고 있다. 이번 전시는 육체와 정신, 몸과 사유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개념에서 출발하여 언어, 문자, 영상 그 어떤 매체에 앞서 가장 오래된 커뮤니케이션 도구인 '몸'을 주제로 기획되었다. 이에 몸에 관한 인문학적, 철학적 개념을 기반으로 사유의 방식을 다양하게 시각화하는 12명의 작가들이 모였다.

이전에 작품을 보았던 작가들도 있고 처음 작품으로 만나는 작가들도 있어서 여러모로 흥미로웠던 전시이다. 타이틀이 <몸의 사유>인 만큼 생각할 부분이 많을 것 같아 한번은 전체적으로 그냥 쭉 보았고, 다시 거꾸로 돌아와 되짚으며 작품에서 궁금한 것들은 스텝분들에게 묻고 어떤 작품에서는 더욱 오래 머무르고 하면서 전시를 깊이 보려 노력했다. 설명을 들어보면 내가 작품을 읽고 해석한 것과 실제 작가의 의도가 일치하는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었는데, 그러한 과정도 재밌고 스텝분들도 모두 친절히 설명을 해주시니 더욱 좋았다.

김준 / 조각상의 표면엔 무언가가 그려져 있고 이는 여러 조각으로 깨어져 흩어져 있다. 가까이 다가가보면 놀랍게도 모두 주류의 상표와 로고인 것. 위 작품은 우리에게 익숙한 참이슬 이다. 소주뿐만 아니라 샴페인, 보드카 등 저렴한 것부터 비싼 것까지 조각의 몸에 새겨져 있는데 금으로 그려진 모엣샹동 작품 같은 경우는 무언가 욕망하는 인간의 마음과 그로 인한 파멸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이용백 / 우리에게 익숙한 도상인 피에타. 부제가 자기 죽음이다. 피에타는 원래 성모마리아가 자신의 아들인 예수를 안고 있는 형상인데, 이 작품은 제목 때문인지 스스로가 스스로의 몸을 안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만일 그렇다면, 스스로가 자신의 죽음을 마주하고 보게 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이야기지만 작품을 통해 상상해본다.

변웅필 / 변웅필 작가의 <한 사람 혹은 여러 사람>. 이 작품은 벽면에 여러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들의 동작은 모두 다르고 입은 옷도 전부 다른데 얼굴은 모두 무표정으로 닮아있다. 왜 다들 아무런 표정도 없고 머리도 없고 눈썹도 없는지 궁금해 물어봤더니 일부러 사람의 특징을 보여주는 머리와, 눈썹을 지우신 거라고. 유학시절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던 것에서 시작해, 사람을 가르는 특징을 지우고, '너와 나는 같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제목에 '한 사람'이 있던 건가 싶다. 한 사람이 라는 것이 한 명의 사람이 여러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 일수도 있지만, 비유적으로 여러 사람이 하나(의 사람)가 될 수도 있는 거니까. 작품이 참 담담한 느낌이라 인상적이었다.
최수앙/ 저 먼 곳을 바라보는 여인. 눈에는 핏발이 서고 다리는 온전히 걸을 수 없는 형태를 하고있다. 한 손엔 두툼한 비닐봉지를 담고 등에는 기묘한 조합의 몸통을 업고 있는 그녀는 높게 세워진 건축물들을 바라보고 있다. 이 건축물은 우리가 한번쯤 본 적이 있는 특정 건물들의 조합이다. 괴롭고 지치지만 그럼에도 도시의 삶을 갈망하고 바라보는 우리들의 모습이 작품 속에 투영되어있다.

이동재 / 이동재 작가의 작품은 알파벳으로 이루어진 이미지들이다. 이 알파벳들은 그냥 놓여진 것이 아니라 실제로 뜻이 있는 문장들이라고. 이를 자세히 보기 위해 다가가면 이미지가 안보이고 이미지를 보려고 멀리 물러서면 글자가 보이지 않게 된다.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과 그럼으로 볼 수 없게 되는 것, 이 두 가지의 경계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이병호 / 일명 '숨 쉬는 조각'인 이병호 작가의 작품. 이게 움직이는 조각이라는데 처음엔 그걸 모르고 그냥 조각이려니 했다. 그런데 약간씩 (아주 미세한) 소리가 나길래 보았더니 정말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총 세 작품이 있는데 뒤에 신전의 형태가 있어 키치한 이미지들을 신화화 시킨 것처럼 보인다. 알고 보니 뒤 쪽 신전의 형태는 작가님의 작품이 아니고 디피를 위해 미술관측에서 만든 것이라고. 어쨌든 대상 자체가 조각상으로 적합하지 않은 것을 대상화 한 것이니 작가의 의도는 아닐지라도 꽤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작품들은 각기 움직이는 시간이 다른데 움직임이 빠르지 않고 미세하니 가만히 보고 있으면 참 신기하다.

육근병 / <생존은 역사다>라는 제목의 영상. 말 그대로 인간의 생존을 위한 움직임이다. 스크린에는 역사 속 실제 영상이 흑백으로 돌아가고 그 위로 눈동자 하나가 깜빡인다. 그 눈동자는 나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영상을 관조하는 눈동자 같기도 하다. 나무로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 계단에 앉아 한참 바라보았는데, 명료한 이미지는 아니지만 영상에서 왠지 모를 고통이 느껴져 괜스레 숙연해졌다.
데비한 / 너무 유명한 작품. 미의 상징인 비너스 상이 오묘하게 뒤틀려있다. 입이 과장되게 커지거나 코가 필요 이상으로 뾰족해져 있고 울퉁불퉁하다. 미란 무엇인가? 요즘의 수 많은 성형외과가 만들어내는 '조각과 같은 얼굴'은 과연 아름다운 것일까? 그러한 질문을 던지게 하는 작품이다.

김기라 / <이념의 무게>라는 드로잉 시리즈 이다. 부유하는 사고들을 구름과 같은 형태로 시원시원하게 드로잉했다. 거침없는 필선과 색감이 감정을 잘 나타내준다. 표현주의적이라고 해야될까. 뭉실거리는 이념들이 사람을 얼마나 옭아매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이형구 / 위 설치물은 잠자리의 눈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잠자리는 겹 눈을 가지고 있고 그 눈은 매우 다양한 방면으로 사물을 볼 수 있는데 사람도 그런 식으로 사물을 볼 수 있도록 여러 방향으로 볼록거울을 설치하고 의자를 마련한 것이라고. 뒤 가방에는 술병이 있는데 마치 앉아 있는 사람을 위한 에너지원 같다. 그 뒤 쪽의 사진 작품은 변웅필 작가와 같이 유학시절의 차별에서 시작된 작품이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큰 서양인들을 마주했을 때, 너와 나는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눈과 입을 더욱 과장되게 키운 것 이라고 하는데 어쩐지 우스운 사람의 얼굴이 되었다.

권오상 / 권오상 작가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익숙한 사람의 형상이 아닌 오토바이형태의 작품. 조금 의외였다. 토르소는 원래 흉상만 있는 사람의 조각을 말하는 것인데 일종의 비유로써 오토바이에 바퀴와 손잡이를 없애고 토르소 라는 제목을 붙혔다.

문성원 / 음표로 이루어진 드로잉. 이 자리에 처음엔 실제로 '아리랑'을 연주할 수 있는 악보가 있었다고 한다. 이를 퍼포먼스 시에 문성원 작가가 음표를 하나씩 옮기며 음표를 이용하여 드로잉 한 것인데, 퍼포먼스 당시 옆에서 연주를 하던 피아니스트가 변화하는 이 악보를 연주했다고 한다. 그래서 인지 처음에는 아리랑 이었다가 이 후에는 곡의 형태가 아닌 피아노 소리의 불규칙한 조합이 된다. 퍼포먼스 영상은 설치 작품 옆에 모니터로 만나볼 수 있다.
몸의 사유는 전시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늘 일상적으로 우리 주변에 있는 것이다. 나 역시 때로는 욕망하고 때로는 절망하며, 살기 위해 애쓰고 존재에 대하여 고민한다. 이번 <몸의 사유>展에서는 그러한 인간적 사유의 면면을 작품을 통해 느껴볼 수 있었다. 작가들은 본인들의 방식으로 본인들의 사유를 가시화 한다. 이 때 <몸>은 작품의 외적 형태에서 직접 드러나기도 하고, 아니면 작업 과정에서 움직여지거나 비유적으로 표현되어 보여진다. 작게는 몸이지만 크게는 인간을 볼 수 있었던, 인간의 사유에 대한 전시라고 생각된다.
인간은 끊임없이 나와 나를 둘러싼 것들에 대해 사유한다. 몸은 그러한 사유의 시작점인 정신을 담고 있고, 사유와 몸은 지속적으로 그 우위를 엎치락뒤치락 선점한다. 나는 무엇을 사유하고 있는가? 전시는 통한 타인의 사유는 나의 내면을 좀 더 깊게 바라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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