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라도 용서할 것만 같다.
눈맞춤이란, 입맞춤보다 싱겁지만 실은 강렬하다. 오래 머문다. 접촉이라기보다는 접속, 네가 나를 바라볼 때, 나도 너를 본다. 이때 많은 것이 무너진다.사진은, 눈맞춤의 오래된 습관이 되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나는 언제든 당신과 눈 맞출 수 있다. 당신도 모르게, 설령 당신이 먼 데 있거나, 다시는 마주할 수 없는 사람일지라도, 나는 당신의 얼굴을 불러, 사실은 당신의 눈을 불러 내 눈을 바라보게 한다. 이러한 눈맞춤은 가짜일까.
머리를 바가지모양으로 단정하게 깎은 아이가 나를 바라본다. 하얀 옷에 하얀 양말, 소매를 살짝 걷어 올렸다. 토실한 볼에 예쁜 쌍꺼풀, 살짝 벌린 입, 아이의 오른팔에 햇살이 스민다. 뚫어져라 나를 보는 너의 눈에, 나도 눈을 맞춘다. 아마도 한 살 남짓, 그러므로 1890년 초여름. 아이는 자라, 화가를 꿈꾸었다. 하지만 버렸다. 새롭게 품은 꿈은, 좋지 않았다. 브레히트는 그를 엉터리화가라 불렀다. 아돌프 히틀러.
아마도 너였기에 백년의 시간을 거스르며 내게까지, 아무 인연 없는 내게까지 올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겐 없던 인연조차 생겼다. 너는 나를 바라보고, 나는 너를 찍었던 사진사의 시선으로 너를 바라보고 있으니. 너는 희대의 악마였지만, 그 전에 아기였다. 평범하다. 너의 평범함은, 어떻게 너의 특별함이 발휘될 것인지를 알려주지 않는다. 단지 아기, 나와 눈맞춤하는 오래된 아기. 아, 악마라도 용서할 것만 같구나. 이를 또 다른 형식의 ‘악의 평범함’이라고 불러도 될까. 혹은 악에 내재된 낭만일까. 용서할 자격 없는 자는, 어찌하여 너를 용서하려 드는가.
한 소녀가 바닷가에서 나를 바라본다. 비키니를 입은 소녀의 흑백사진은, 대한민국정부 기록사진집에서 나왔다. 그 출처가 이 아이의 특별함을 증빙한다. 이 사진은 어느날 느닷없이 모니터로 소환되어 대단한 구경거리가 되었다. 누군가는 감격하고, 누군가는 빈정대고. 분명한 건 소녀가 나를 바라본다는 사실, 나는 소녀를 찍었던 사진사의 시선이 되어 그녀와 눈맞춤한다는 사실. 평범해 보이는 그녀는 평범할 수 없는 가족사를 겪었다. 소녀의 아버지는 누군가에겐 구세주였고, 누군가에겐 악마였다. 히틀러가 그랬듯. 1967년 여름, 박근혜.
베레모를 쓴 군인이 나를 노려본다. 늠름하다. 유신의 칼에 베어 제적과 징역을 감당해야 했던 청년에게 군대는 또 다른 감옥이 아니었던가. 어찌하여 그는 씩씩한가. 소녀가 국모를 대행하던 시절, 청년은 다른 세상을 꿈꿨다. 소녀의 비키니 사진이 화제가 되자, 대응이라도 하듯 청년의 특전사 사진이 모니터를 뒤덮었다. 사람들은 그 씩씩한 눈과 마주쳤다. 1976년, 문재인.
무엇일까, 이 사진들은. 우리와 눈맞춤하는 이 오래된 사진들이, 히틀러와 박근혜와 문재인에 대해 말해주는 건 무엇일까. 옛날사진은 판단력에 재를 뿌린다. 악마의 어린시절이 담긴 낡은 사진마저도.
정치란, 유권자의 판단을 흐려놓아야 성공하는 것일까, 명료하게 해야 성공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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