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 29, 2013
김동식, <연기(演技/延己)하는 유전자의 무의식에 대하여>
디드로는 『배우에 관한 역설』에서 일상적이면서 흥미로운 한 편의 일화를 제시하고 있다.
한 남자에게 사랑하는 여인이 있다. 드디어 심각한 고백을 털어놓아야 할 때가 되었다. 감정적인 사람이라 언제나 벌벌 떨면서 사랑하는 대상에게 다가가곤 한다. 심장은 벌렁거리고 생각들은 뒤죽박죽이 되고, 목소리는 어찌할 바를 몰라 말하는 내용을 망쳐버리곤 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우스꽝스러운 자신을 의식하면 의식할수록 더욱더 버벅대기만 한다.
그런데 여인을 사랑하지는 않지만 모종의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다른 남자가 개입한다. 그는 재미있고 가벼우면서도 스스로를 잘 통제할 줄 알고, 자기 자신을 잘 즐길줄 알고, 또 칭찬할 수 있는 어떤 기회도 놓치지 않으며, 그것도 아주 섬세하게 칭찬하고 웃기고 즐겁게 하는 행복한 사람이다.
둘 가운데 누가 아름다운 여인의 선택을 받았을까.
감정의 밀도와 순수성에 의해 사랑이 선택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보면, 당연히 여인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디드로의 시절이나 은희경의 시절이나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순정이나 열정보다는, 오히려 순정이나 열정이 결여됨으로써 생겨나는 세련되면서도 cool한 태도들이 사랑을 얻는 열쇠가 되니 말이다. 꾸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벌거벗은 열정이 왜 퇴짜를 맞았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연기력 부족.
순정보다는 연기력이 사랑을 얻는 상황이 지배적인 현실이라면, 사랑을 얻기 위해서는 감정을 끊임없이 객관화, 탈낭만화 해야하지 않겠는가. 디드로의 예화가 담고 있는 모티프들의 확장과 변주를, 은희경의 작품에서 발견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Subscribe to:
Post Comments (Atom)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