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 18, 2013

<부드러운 교란-백남준을 말하다>, 백남준아트센터 (2013.1.31-6.30)


전시를 보러 가는 길, 버스에서 깜빡 잠이 들어 처음 보는 낯선 곳에서 내리고 말았다. 길을잃은 나는 당황함과 동시에 오히려 담담하게 이정표를 찾았다. 그리고는 내린 곳의 반대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익숙하게 눌러대던 스마트폰을 내려두고 길을 찾자니 혼란스런 심정. 나올 것 같은데 나오지 않는 목적지에 불안한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고 맑은 날씨와 오랫만의 길잃음에 마음이 들떴다. 여행자의 마음으로 길을 걷다 도착한 곳은 백남준이 오래사는 집, 바로 백남준아트센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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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아트센터에 도착하면 특이한 로고가 눈에 들어온다. 물음표에서 반대로 된 물음표를 빼면 무한대가 된다는 수식이다. 이것은 내가 길을 걸으며 했던 수많은 생각들을 일순간에 정리하는 짜릿한 상징물이었다. 물음과 호기심, 그것을 뒤집어 또다른 질문을 넣으면 무한한 세계가 다가오는 것을 보여주는 듯 했다. 이는 백남준이 자신의 54세의 생일을 기념하며 만든 작품 내부에 넣은 것으로, 그를 가장 잘 나타내는 문구라고 한다. 나는 이것과 함께 백남준과 인사를 하며 전시장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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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운 교란 - 백남준을 말하다>전은 2013년을 여는, 백남준아트센터의 첫 전시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정치적이었다고 평가받는 <과달카날 레퀴엠>에서 출발하여 기존사회질서에 물음을 던지는 여러 작품들이 전시되고있다. 당시 굉장히 파격적인 시도였던 샬롯무어먼과의 프로젝트 <오페라 섹스트로니크>를 비롯하여 백남준과 함께 움직이던 이들의 인터뷰, 그 외 우리에게 친근한 TV침대, TV물고기, TV정원과 각종 자료들이 그의 작품세계를 더욱 폭넓게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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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초입엔 <TV 물고기> 작품이 있고, 뒤이어 이번 전시의 메인작품 <과달카나 레퀴엠>을 만날 수 있다. 영상의 배경이 되는 과달카나섬은 제 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에 대한 연합군의 첫 공세가 펼쳐진 격전지로, 백남준은 1976년에 첼리스트 샬롯 무어먼과 이 비디오를 촬영했다. ‘세계가 지옥의 변방같아.’ 그렇게 말하는 참전자들의 인터뷰와 전투장면이 교차되고, 그 사이사이 첼로를 연주하는 무어먼이 등장한다. 그녀가 첼로를 마치 총과 같이 다루고 포복하는 사이 다시 실제 전투장면이 겹쳐친다. 승자이기도 패자이기도 한 무어먼의 연주는 그렇게 계속된다. 백남준은 실험적인 이 작품을 통해 전쟁에 대한 트라우마가 승자와 패자 모두에게 상처가 됨을 환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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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샬롯 무어먼은 <오페라 섹스트로니크>공연을 통해 당시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신성하게 여겨졌던 클래식공연장 안에서 상체를 드러내고 연주를 했기 때문. 그녀는 초대된 일반 관객 2백여명 앞에서 노출을 했다는 이유로 연주 도중 경찰에 체포되었다. 백남준은 문학과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인 섹스가 오로지 음악에서만 금기시된 것에 의문을 가졌으며 <오페라 섹스트로니카>을 연출하며 이를 흔들어 보고자 하였다. 전시의 주제인 <부드러운 교란>은 바로 이와 같이 예술을 통해 기존의 사회질서를 ‘교란’시키는 시도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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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에는 <오페라 섹스트로니카> 영상과 그로 인해 소송에 휘말리게 된 무어먼의 이야기, 당시 재판을 판결한 판사의 판결문이 함께 전시되고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이들이 움직임이 얼마나 급진적이었는지를 엿볼 수 있다. 당시 샬롯 무어먼은 ‘예술가를 범법자로 취금해 구금한 사례는 극히 드물다’고 이야기한다. 지금에야 예술에서 많은 것들이 허용되어 있지만 보수적이고 딱딱한 사회에서, 그것도 클래식한 오페라 공연에서, 나체의 여성이 연주하는 첼로곡을 듣던 이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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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이런식으로 기존 체제에 대해 반문하고 역으로 돌려보면서 예술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작업을 해왔다. 그는 새롭고, 전파속도가 빠른 매체인 비디오를 통해 여러가지 실험을 감행한다. 전시작 중 하나인 <참여TV>를 보면 일방향인 TV화면 속에서 백남준이 일종의 명령을 내리고 있다. ‘눈을 감으세요./눈을 뜨세요./ 4분의 3만큼 눈을 감으세요./3분의 2만큼 눈을 뜨세요.’ 하고 말이다. 상대방이 보이지않는 상황에서 이 명령이 무슨소용일까. 과연 수신자는 TV에 참여가 가능한 것일까? 백남준의 작품들은 작품을 통해 또다른 물음을 갖게 하는 특성이 있었다. 이러한 물음이 계속 해서 떠오르는 것은 그가 주로 다루는 TV, 비디오라는 소재가 우리와 너무도 친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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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직접적으로 TV를 이용해서 작업한 <TV침대>를 보면 우리가 얼마나 보는 것에 감싸여지고 있는가를 생각해보게 된다. 여러개의 발광하는 TV로 이뤄진 침대에서, TV 속 무어먼은 첼로를 매고 전투병이 되어 기어가고 있다. 또 다른 TV에서 전투병은 얼굴이 보이지 않는 여인의 몸을 기어가고, 그 모든 풍경 밖에서 전투병 인형이 침대 위를 기고 있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고 진행중이며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 TV속과 TV밖 현실이 다르지 않고 계속적인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우리들의 삶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전시장 초입에 있는 작품 <TV물고기>도 이와 같은 맥락일 것이다. 물고기가 TV 비디오를 배경으로 한 수족관에서 숨을 쉰다. 우리는 수족관 속 물고기처럼 매체가 없이는 생활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영향력은 과거 백남준의 시대보다도 더욱 어마어마해지고 있다. 수 많은 TV와 나무, 풀로 이루어진 <TV정원>에서도 나는 이러한 매체의 영향력을 느낀다. 작품을 보며 묘한 안도감을 느끼던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았다. 내가 안정감을 느끼는 것은 나와 익숙한 TV의 빛과 소리 때문인가, 아니면 자연상태의 나무와 풀 때문인가? 자연에서 난 인간이라면 무릇 나무와 풀에 더 익숙할 것이나, 과연 현재의 인간은 정말 그것에 더 익숙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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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를 보던 중 노출이 많은 영상들 때문이었는지 함께 전시장을 걷던 아이들이 부모에게 '작품이 야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부모는 '이건 야한게 아니고 예술이야'라고 답한다. 언어적 설명이 과연 얼만큼의 이해를 도울 수 있을까? 있는 그대로 느끼는 것과 설명의 차이는 예술의 이해에 얼마나 영향을 줄까. 대화 후 아이는 다시 작품을 보았고 부모는 카메라로 그 풍경을 찍었다. 그 옆에 적혀있던 편지글에서 백남준은,  "우리는 정보가 넘치는 시대에 살고있다는 것을 더욱 인식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정보를 '저장'하는 것보다 '회수'하는 것이 더 복잡해진다는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습관적인 풍경의 저장. 그리고 방치되는 정보. 이를 어떻게 다시 받아들이고 꺼내어볼 것인지는 생각해 볼 문제이다. 전시는 이런식으로 계속해서 우리를 둘러싼 매체에 대해 사고하게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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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부드러운 교란>전에서는 크게 나누어진 4개의 섹션으로 백남준의 작품을 전시하며, 그와 관련된 여러 자료들(편지글, 원본포스터, 주변 아티스트들의인터뷰 등)을 함께 보는 구성이 좋았다. 너무 유명하지만 다른 기획전에서 한두작품씩만 작품을 보게 되어, 오히려 생소하게 느꼈던 백남준을 면밀히 살펴 볼 기회였다고할까. 백남준이 예술 활동을 펼친 경로에 따라 촬영한 장 폴 파르지에의 <백남준, 다시 재생하기> 같은 다큐멘터리는 그의 생전 모습과 작품세계를 보다 가까이 느낄 수 있는 작품으로 시간을 들이더라도 꼭 한번 보는 것을 추천한다. 그 외 아트샵에서도 백남준에 관한 여러 서적과 백남준아트센터의 도록 구입이 가능하다. 전시 뿐만 아니라 출판물들도 자료가 많으니 그에 관해 더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좋은 참고가 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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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은 시작은 다시 생각해보면 전시를 위한 필연적 사건과도 같게 느껴진다. 백남준은 의도적으로 길을 잃기도 하고 그 곳에서 억지 쓰지 않고 머물러도 보고 전혀 다른 길을 걷기도 했다. 그 안에서 그의 세계가 확장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나의 질문, 혹은 호기심이 태동하고 그 안에서 또다른 물음이 이루어져 무한한 세계를 이루는 것을 보며 세계가 이 안에 있음을 본다. 그리고 매체포화 상태에 이르른 지금 그가 남겨왔던 글과 자취들이 지금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티비위에서 잠을 자고 티비안에서 숨을 쉬고 티비로 된 전등으로 빛을 밝힌다. 당신의 세계 속 티비는 어떤 채널을 보여주고 있는가?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 그곳의 티비는 지금도 쉬지 않고 채널을 바꾸고 있다.

*위 리뷰는 뮤움에 게재되었습니다. (링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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