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 9, 2013

흐린 날, 과도하게 밝은 두 가지의 것


김석, <ARE YOU HAPPY?>, 철판합성수지에 페인트, 134.5×134.5×31cm, 2009

급한 마음에 택시를 탔다. 목적지를 말하고 피곤한 몸을 잔뜩 시트에 기대고 있었다. 하릴없이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는데 아저씨가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나이는 몇 살이야? 고등학생 같네. 남학생이 뒤에서 따라오겠어. ? 허허허."
", . . 아니에요."
"모자 때문에 엄청 어려보이네. 그런 소리 많이 듣지? ?"

그나마 켜져 있던 라디오가 꺼졌다.

"홍대에는 무슨일로 가는거야? 직장이야?"
"아니요. 따로 볼 일이 있어서요."
"그럼 지금 일 안해?"
"아니요. 일 하고 있어요."
"그럼 어디서 일해? 여기 말고 다른 동네야?"
", 그냥 뭐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어요."

창 밖이 어둡고 흐렸다. 황사가 심한가.

"아가씨 안경은 보호용이야?"
"? 아니요. 그냥 선글라스에요."
"그래? 멋있네. 어제는 하루 종일 손님이 하나도 없었어. 나 아까 거기서 아가씨 만나려고 20분 기다렸어. 모자 쓰고 왔잖아. 내가 기다렸다구."

20분과 모자의 상관관계를 생각해 봤다. 차가 좀 밀리더니 어느새 빠지기 시작했다.

"토요일에는 차가 엄청 많았다구. 손님도 많고. 그 뭐야. 한식인가? 암튼 그거 때문에 나가는 차가 엄청 많았어요. 그래서 내가 오후 2시에 나왔는데 밤 늦게까지 계속 차 안에서 있었어. 근데 일요일 되니까 도로가 아주 깨끗해. 손님도 많고."
", . 몰랐어요."

내 눈은 창 밖을 보거나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대답은 거의 단답형이었다. 아저씨의 질문은 끊이지 않았다.

"술은 잘 마시나?"
"아니요. 그냥."
"얼마나 마셔?"
"소주 같은건 아예 못마셔요."
"그래? 그럼 와인좋아하겠네? 우리 마누라도 와인을 좋아해. 어딜 갈 때마다 와인을 사가더라고. 여자들이 그런 술을 좋아하지. 아주 혼자서도 홀짝홀짝 잘 마셔. 으허허허. 애들도 그러고."

목적지 근처였다. 이번 미팅의 스케줄을 계산해보면서 다음 미팅에서 만날 사람에게 연락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남자친구는 없어? 왜 없어? 요즘 남자애들이 별로야?"
"아니, 뭐 꼭 그런건 아니구요."
"그럼 전에 남자친구랑은 왜 헤어졌어?"
"그냥요."
"? 돈을 안 써? 요즘 애들은 돈 아주 잘 쓰던데? 여자들이 아주 편하겠어. 그렇지 않아?"
"아니요, 그래서 그런건 아니에요."

쉬지 않고 이야기 하는 마음에는 뭐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운전대를 봤다. 비닐기가 있는 아저씨의 검정색 추리닝 바지 위로 차 키에 달린 열쇠고리가 실없이 달랑거린다. 선전화 같은 푸른 바다 위로, 밝은 노란색의 G . U . A . M 네 글자가 진하고 선명하게 찍혀있다. 누가 보더라도 관광기념품이다. 아저씨는 저 곳에 다녀온 적이 있을까, 아니면 누군가의 선물이었을까. 말이 없는 내 덕분에 다시 라디오가 켜졌다. 라디오에서는 세 명의 남녀가 무언가 신나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여전히 창 밖이 흐렸다.

"카드로 결제할게요."
". 잠깐만. 됐어, 이제 찍으면 돼. 오케이 좋아."

카드결제기가 영수증을 내뱉고 아저씨는 여전히 들떠있는 목소리로 잘가라며 인사를 했다. 택시 안은 공백이 자리할 틈이 없었다. 어쩌면 아저씨는 의도적으로 모든 공백을 지우고 있었는지 모른다.

"감사합니다."

택시의 차 문을 닫고 내리는데 기분이 뭔가 이상했다. 그건 아마도 날씨가 흐리기 때문일거라고, 아까 보았던 G . U . A . M 네 글자의 밝고 진한 노란색과 과도하게 밝은 아저씨의 목소리 때문일거라고,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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