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9,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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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002. 어부바, 젖 비린내 나는 삶의 나열

마지막으로 부모님에게 업혀본 게 몇 살 때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마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어린 시절에는 나도 꽤나 오랜 시간 그들의 등을 차지하고 있었을 테다. 나의 유년기는 뛰어다니며 장난을 치고 극성맞게 놀던 기억이 대부분이다. 호기심도 많아서 집안 어른이 컵라면 용기에 뜨거운 물을 부어주면 그 속이 궁금해 작은 키로 까치발을 들다, 뜨거운 물을 온 몸에 쏟고 앙앙 울던 아이다. 놀이 중에서는 냉장고문을 타고 노는 것을 즐겨 했다. 유치원에서는 짝사랑하는 남자친구가 둘이나 있었고 처음 한글을 배우면서는 ‘ㄷ’의 방향이 자꾸 헷갈렸다. 그런 아이는 망아지처럼 뛰어 놀다 잠이 오면 잠투정을 한다고 부모의 등에 업혔다. 유원지를 걷다가는 힘들다 업히고, 업혀서는 세상 모르고 잠을 자거나 칭얼거리거나, 하여간에 나만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그 등을 온 몸으로 안았다. 어릴 적 사진 중에 엄마 등에 업혀 활짝 웃으며 브이를 그리고 있는 사진이 있다. 지금과 웃는 얼굴이 똑같다. 그런데 나는 그 장면이 하나도 기억 나질 않는다. 저렇게 가까이 몸이 붙은 때가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되지 않는 장면이다.
어부바는 부모와 아이가 가장 가깝게 몸이 붙어있는 순간이다. 노순택 작가의 사진 속에서는 이 ‘어부바’가 등장한다. 어부바라 하면, 으레 따뜻하고 행복한 모습을 상상하겠지만 작가의 사진 속에 그런 분홍색 포근함은 없다. 작가는 어떠한 연출도 없이 그가 발 딛고 다니던 현장들에서 만난 어부바를 담았다. 노동의 현장에서도 놀이터에서도 길 위에서도 아이는 업혀 있다. 놀이 중 아버지의 목에 낑낑거리고 매달리는 아이, 깊은 밤 잠들어 들쳐 매진 아이, 비행장을 구경하는 아이, 산행 중 지쳐 업힌 아이, 저 먼 곳을 보게 해주려는 아버지의 목마를 탄 아이, 그런 모든 풍경의 아이들, 아이들, 아이들‥. 부모에 몸에 찰싹 달라붙은 아이의 존재는 끈덕지다. 그 존재의 끈덕짐만큼 부모는 받아들여야 할 짐이 많다.

현재 류가헌에서 열리고 있는 노순택 작가의 사진전 『어부바』는 가정의 달을 맞아 준비된 조금은 다른 시점의 가족적 전시다. 작가는 ‘무자식은 상팔자다 유자식은 쌍팔자다’[1]라고 운을 띄우며, 사진을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십여 년간 아이를 키워온 작가는 한국사회가 부모에게 요구하는 의무감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작가가 유년기를 보낼 때만 해도 사회는 아이를 적게 낳을 것을 권장했고 아이가 많은 것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러던 사회가 어느 새 무자식이야말로 나라에 불충하는 짓이오, 미래를 갉아먹는 짓이라고 입장을 싹 바꾸어 버린다.[2] 모두가 행복한 가정과 가족관계를 이야기 하는 가정의 달 5월. 하지만 알다시피 자녀 양육이 그렇게 녹록하지만은 않다. 노순택 작가의 <어부바>는 한국의 자녀양육현실에 대해 묻고 있다. 그리고는 나아가 한반도의 끝없는 어부바, 세습 구조에 대해서 언급한다.
“지금 한반도는 잘못된 어부바의 정치경제 현장이다. 북녘에선 김씨 부자가 정치 경제 문화를 총동원하고 남녘에선 박씨 부녀가 정치를, 이씨 부자가 경제를 틀어쥐고 있다. 비로소 한반도에 진정한 김, 이, 박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들 절대권력의 요체는 ‘끝없는 어부바’, 즉 세습이다. 우리는 그들을 비난하는 동시에, 부러워한다.” – 노순택 [3]

대학 때 정치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사진학을 공부했던 작가는 전쟁과 분단에서부터 파생된 한반도의 사회적 현장, 정치적 장소들에 머물며 사진을 찍어왔다. 예술이라는 정치적 장르에서 정치를 거론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예술적이라는 순수의 강박을 [4]그는 묘한 웃음으로 넘겨짚는다. 그의 작업은 보도사진이라 하기에 조금 옆으로 나가있고 예술사진이라 규정하기에는 조금 엇나가 있다. 작품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사진 속 대상을 밝게 비추는 플래시는 그 극명한 빛과 어둠의 경계로 현실의 부조리를 두드러지게 한다. 대상이 현실에서 밝게 빛나지 않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밝게 비추어 본다. 그걸 보고 있자면 그가 비추는 것이 현실이고 삶이어서, 혼자 걷던 길을 멈추고 만다. 나는 이번 전시에서 말 없는 부모의 등과 제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아이의 등을 보며 내내 눈이 뜨거웠다. 작위적인 감동은 일단 저리 치워두고, 아이의 젖비린내가 나는 삶의 나열 앞에서 ‘가족의 행복’ 같은 것은 너무도 선전적인 문구가 되어버렸다. 길 위에서 아주 쉽게 마주할 수 있는 삶, 그러나 그 고단함은 알고 싶지 않았던, 그래서 내가 보고 싶지 않았던,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풍경들이 예고도 없이 내 속을 찔러댔다.
부모의 등에 업힌 아이는 세상을 아직 모른다. 아이가 모르는 세상을 부모는 알까, 아무렴 부모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를 들쳐 매고 걷는다. 힘들어도 걸어야 한다. 으레 인내하고 겪어내야 한다. 누구를 위해서? 자신을 위해서? 아이를 위해서? 제 몸 하나 못 가누는 아이를 들쳐 매고 궁둥이를 손으로 떠받치며, 자식 가진 부모라면, 누구나 이런 질문을 한번쯤은 해봤으리라. 사랑 받지 못하고 자랐다 말하는 이도 어린 시절에는 누구나 어른의 등에 업힌 아이였다. 스스로 설 수 없는 몸이 그 등에 기댔고, 내가 울고 있을 때면 날 달래던 손길이 있었다. 걷다 지치면 누군가 나를 업어 나 대신 길을 걸어 주었다. 마지막으로 부모님에게 업혀본 게 몇 살 때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마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어린 시절에는 나도 꽤나 오랜 시간 그들의 등을 차지하고 있었을 테다. 이제는 내가 이미 너무 많이 자라버렸는데, 그렇지만 그렇다고 내가 아이를 업을 수 있는 존재라 할 수 있을까. 아이를 업기에 나의 몸뚱이는 너무 작고, 이 땅 위에서 나는 쥐고 있는 것이 너무 없다. 사진 속 어부바의 뒷 모습이 나에게 말한다. ‘어부바’는, ‘어부바’는 정말이지 쉽지 않은 삶의 무게라고.
“부모는 애착한다. 사진은 포착한다. 인생은 불시착한다.” – 노순택 [5]
[1] 노순택, 전시장에 들어서면 도입부에 위치해 있는, 작가가 직접 손으로 쓴 글
[2] 노순택, <어부바> 작가노트 중. 2013.1
[3] 노순택, 전시작품이 담겨있는 책, <어부바> 9쪽, 2013
[4] 노순택, 2007년 파주 갤러리 로터스에서 열린 개인전 <붉은 틀 Red House>의 작가노트 ‘카드놀이-네가 나에게 카드를 내밀듯, 나도 네개 내밀 카드를 쥐고 있다’ 중. 2006.10.
[5] 노순택, 전시장에 들어서면 도입부에 위치해 있는, 작가가 직접 손으로 쓴 글
노순택 사진전 <어부바>는 경복궁 역 근처에 위치한 고즈넉한 한옥공간, 류가헌갤러리(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7-10)에서 5월 19일까지 열린다. 작품이 담긴 사진집은 전시기간 내에만 구입이 가능하며 별도의 관람료는 없다. (문의. 류가헌갤러리 02-720-2010)

Photo,Text_이지원(독립큐레이터)
 *위 글은 리펠러에 게재되었습니다. (링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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