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49
'난 불행해'라는 생각이 '지상에 존재하는 것은 무익한 활동'이라는 생각으로 확장되기란 어찌나 쉬운지.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라는 경박한 불평이 '사랑은 환상'이라는 우아한 경구로 승화되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흥미로운 점은 존재와 사랑이 무익하냐 아니냐가 아니라(일개 인간이 그런걸 어떻게 알겠는가?), 어떻게 본래의 촉매제는 사라지고 아주 일반 적이고 보편적인 좌우명만 남느냐 하는 것이다.
p114
그녀는 이유를 분석할 수 없었지만, 에릭의 집 어두운 부엌에 앉아 있노라니 불현듯 극적으로 자신감이 사라져버렸다. 몇 분전만 해도 어른의 세계에서 생존할 수 있는 힘을 갖추고 있다고 자신했는데, 발이 걸려 넘어지지 않고 필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자신했는데, 이제 모든게 급속도로 해체되어 자책감과 혐오만 남았다. 그녀의 자신감은 늘 확인을 받아야만 자라는, 불완전한 구조였다ㅡ원하는 걸 얻거나, 누군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의 사랑을 받으면 자신과 타인에 대한 믿음을 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믿음은 바람이 빠지는 타이어 같아서 늘 다시 채워줘야 했고, 그게 불가능해지면 이전의 낙관이 오만한 허위로 보이는 상태로 급속히 빠져들었다.
p136
내 필요를 고백할 때는 감정적으로 벌거숭이가 된다ㅡ당신이 없으면 헤매게 될 거라고, 독립적인 사람처럼 보이려 애썼지만 꼭 그렇지도 않으며, 인생의 방향이나 의미도 모르는 형편없이 유약한 인간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내가 울면서 이야기할 때, 남들이 그 사실을 알면 끝장이지만, 나는 당신이 비밀을 지켜줄거라고 믿는다. 파티에서 유혹적인 시선을 던지는 게임을 그만두고 내가 관심 있는 사람은 바로 당신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면, 나는 조심스레 빚어온, 단단한 허상을 벗어버린다. 나는 무방비 상태가 되어, 서커스 묘기에 나선 사람처럼 판에 묶인채 상대방을 믿어버린다. 느는 내 피부에 스칠 듯 비수를 던진다. 내가 자의로 그에게 내준 비수를. 나는 당신 앞에서 초라하고 자신을 믿지 못하고 동요하며 자신감을 잃고 자신을 증오하는 모습을 보였으므로,(필요한 경우) 그 반대 모습이 되리란 걸 당신에게 설득할 수가 없다. 새벽 3시에 겁에 질린 얼굴을 당신에게 보일 때면 난 약한 사람이 된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 뽐내던 허세도, 낙관적인 철학도 없이 존재 앞에서 불안하다. 나는 엄청난 모험을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평소 자신감 넘치는 미인이 아니더라도, 당신이 내 두려움과 공포를 줄줄 꿰고 난 뒤에도, 당신은 날 사랑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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