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9
"저 와타나베, 날 좋아하니?"
"물론"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럼 내 부탁 두 가지 들어줄래?"
"세 가지라도 들어줄게."
나오코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두 가지면 돼. 두 가지로 충분해. 한 가지는, 네가 이렇게 날 만나러 와 준 것에 대해 내가 무척 고마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 주었음 하는 거야. 아주 기쁘고, 정말ㅡ구제받은 기분이야. 설령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사실은 그래."
"또 만나러 올게"라고 나는 말했다. "다른 한가지는?"
"나를 기억해 주었으면 해. 내가 존재했고, 이렇게 네 옆에 있었던 일을 오래도록 기억해 주겠니?"
"물론 죽는 날까지 기억하고 있을 거야."라고 나는 대답했다.
그녀는 그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앞서서 걷기 시작했다. 나뭇가지 끝을 빠져 나온 가을 햇살이 그녀가 입은 윗도리의 어꺠 위에서 아물아물 춤추고 있었다. 또다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것은 아까보다 얼마만큼 우리 쪽으로 다가와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나오코는 자그마한 언덕같이 부풀어오른 곳을 올라, 소나무 숲 바깥으로 빠져 나가서는, 비스듬한 내리막길을 잰 걸음으로 내려갔다. 나는 그 두세 발 뒤를 따라 걸었다.
"이쪽으로 와 봐. 이 근처에 우물이 있을지도 몰라" 하고 나는 그녀의 등 뒤로 말을 걸었다. 나오코는 걸음을 멈추고 방긋 웃으며, 내 팔을 살며시 잡았다. 그리고 우리는 남은 길을 둘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정말 언제까지고 날 기억해 줄 거니?"하고 그녀는 속삭이듯 조그만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까지고 기억할 거야"라고 나는 말했다. "너를 잊을 수 있을 턱이 없어."
p202
"이 사람과 같이 있는 한 나는 괜찮다고 생각했어요"라고 레이코는 말했다. " 이사람과 함께 있는 한 내가 다시 나빠질 일은 없을것이라고 말이에요. 있잖아요, 우리네들 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신뢰감인 거에요. 이 사람에게 모든 걸 맡기면 염려 없다, 조금이라도 내 상태가 나빠지면, 즉 나사가 풀리기 시작하면, 이 사람은 제빨리 알아차리고 주의 깊게 참을성 있게 고쳐 줄 것이다ㅡ나사를 다시 꽉 조여 주고, 실뭉치를 풀어 줄 것이다ㅡ그런 신뢰감이 있으면, 우리네들 병은 전혀 재발하지 않죠. 그런 신뢰감이 존재하는 한 좀처럼 저 헤가닥!은 안 일어나요.
정말 기뻤어요. 인생이란 이 얼마나 근사란 것인가 하고 생각했죠. 마치 싸늘하고 거친 바다에서 끌어올려져 담요에 몸을 둘둘 말코 침대에 편히 누워 있는 듯한 그런 기분이었죠"
p375
"네가 무척 좋아, 미도리."
"얼마만큼 좋아요?"
"봄날의 곰만큼 좋아."
"봄날의 곰?" 하고 미도리가 또 얼굴을 들었다. "그게 뭐에요, 봄날의 곰이라니?"
"봄날의 들판을 네가 혼자 걷고 있었더니 말이야, 저쪽에서 비로드같이 털이 보들보들하고 눈이 동글동글한 귀여운 새끼곰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거야. 그리곤 너한테 이렇게 말하지. '안녕, 아가씨, 나랑 같이 뒹굴기 안 할래요'라고 말이야. 그리곤 너랑 새끼곰이 서로 꼭 껴안고 클로버가 무성하게 돋은 비스듬한 언덕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하루 종일 노는 거야. 어때 근사하지?"
"정말 근사해요."
"그만큼 네가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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