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 1, 2011

공지영, <존재는 눈물은 흘린다>

p159
 모든 존재는 저마다 슬픈거야.
그 부피만큼의 눈물을 쏟아내고 나서 비로소 이 세상을 다시 보는 거라구. 너만 슬픈 게 아니라…… 아무도 상대방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멈추게 하진 못하겠지만 적어도 우리는 서로 마주보며 그것을 닦아내줄 수는 있어. 우리 생에서 필요한 것은 다만 그 눈물을 서로 닦아줄 사람일 뿐이니까. 네가 나에게, 그리고 내가 너에게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해.



p171
 페루로 떠났다면 그건 막막하잖아요. 막막한 거 말이에요. 내리는 이 비를 그가 보는지 어떤지 그 여자는 모를 테니까요.


 여기서 비가 내리는 날 페루의 한 도시에선 건조한 모래바람이 불지도 모르고, 여기서 눈이 내리는 날 페루에선 사람들이 해수욕을 떠나고, 여기가 화창한 어느날 페루에서는 폭풍우에 시달린 새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일본도 아니고 미국도 아니고 뭐 프랑스, 독일도 아니고 신문의 세계 주요도시의 일기예보에도 나오지 않는 페룬데…… 아시겠어요?


 내가 먹는 우동을 그도 지금쯤 저기서 먹고 잇겠지, 하는 생각도 못하고 내가 듣는 이 노래를 어디선가 그도 듣고 있겠지, 그런 생각도 못하고 우리가 자주 걷던 길을 걸으면서 한번쯤 내 생각을 할까. 내가 그런것처럼, 하는 생각도 못하고……


 힘들었겠지요.  언제나 보내는 사람이 힘겨운 거니까요. 가는 사람은 몸만 가져가고 보내는 사람은 그가 빠져나간 곳에 있는 모든 사물에서 날마다 그의 머리칼 한올을 찾아내는 기분으로 살 테니까요. 그가 앉던 차 의자와 그가 옷을 걸던 빈 옷걸이와 그가 스쳐간 모든 사물들이, 제발 그만 해, 하고 외친다 해도 끈질기게 그 사람의 부재를 증언할 테니까요. 같은 풍경 같은 장소 거기에 그만 빠져버리니 그 사람에 대한 기억만 텅 비어서 꽉 차겠죠. 그 여자가 어떻게 힘들지 않을 수 있을까요.




 담배 피우는 여자를 보면 그 여자 생각이 나요. 담배 피우는 여자는 이 세상에 그렇게도 많은데.

 그의 고개가 내 담배연기 속으로 숙여졌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바바리 자락을 만지작거리더니 그는 혼자 생각에 잠겼다.

 그런거에요. 산다는 게…… 담배를 보고 생각하고 남산을 보고 생각하고, 하지만 그건 담배 탓도 남산 탓도 아닌걸요.




 그의 작은 아파트가 남산 아래에 있었고 그의 집에 처음 갔을 때 커튼을 열자 불쑥 다가오던 남산의 탑. 밤이 되면 페르시아 왕자의 보석 모자처럼 어둠 속에서 황홀히 빛나던 그 탑.

 그가 나의 잠옷으로 정해준 그의 낡은 면 티셔츠, 휴일이나 토요일 오후 나는 그의 커다란 티셔츠를 원피스처럼 입고 엎드려서 앙상한 다리를 함부로 덜렁거리며 그의 집에서 영화를 보고 또 커피를 마셨다.

 그는 그 티셔츠를 페루로 가져갔을까.

 내게서 사라진 지 오래지만 많이 빨아서 씰크처럼 후들거리는, 소매 끝이 약간 바랜 그 면 티셔츠의 초록색은, 아이를 재우고 잠옷으로 갈아입을 때마다 내 팔이 먼저 기억해냈다.

 그 빛바랜 티셔츠가 있던 그의 집은 아직도 남산 아래에 있지만, 그래서 지금은 다른 사람이 거기서 라면도 끓여먹고 살고 있겠지만, 그 사람들도 가끔 창을 열고 남산 탑을 바라보겠지만, 그래도 퇴근길에 그를 만나기 위해 내가 찾아갔던 그 비탈길과 택시에서 내린 우리가 서둘러 입맞추던 어두운 골목길과 우리가 자주 가던 홍합탕을 끓이는 집은 아직 거기 있다.

 담배 피우는 여자를 어디서나 볼 수 있듯이 남산도 서울 어디서나 보인다. 심지어 고속도로를 달려 아직 서울로 진입하기 전에도 언덕을 넘으면 한강 너머 멀리 거기 남산 탑이 보인다. 서울 토박이지만, 나는 남산 탑이 그렇게 서울 어디서나 잘 보이는 곳에 있는지 알지 못했었다.

 기억은 머리로 하는 것이지만 추억을 가슴으로 하는 것이어서 내 가슴의 탑은 날마다 불을 환히 밝혔다.


 나는 남산 탑에 버림받은 여자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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