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 1, 2011

딸기밭 / 신경숙


p44
 무엇을 잊는다는 것은 대상을 심연에 밀어놓고 문을 닫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언제부턴가 끊긴 우편환과 함께 지워진 존재, 나의 아버지. 내 생의 출입구에 부재의 이미지를 각인시켜놓고 돌아오지 않은 아버지의 존재가 그 삼월의 교정, 그 남자가 신고 있는 흰 고무신에 의해 닫힌 문을 열고 이끌려 나오는 것을 가슴 쓰라리게 바라봤을 때는.


p148
 사랑이 다시 오면 이제는 그렇게 휘둘리지 않고 놀라지 않고 아프지 말아야지. 깊은 한숨과 함께하는 일이란 걸 인정 해야지. 외로웠지만 사랑이 와서 내 존재의 안쪽을 변화시켰음도. 사랑은 허물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도…


p265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물만 보였다. 물속에서 벼들이 뿌리가 뽑힌 채 요동을 치며 흘러갔고 돼지며 닭이며 솥단지며 등잔이 물에 쓸려 내달렸다. 누구도 자신들의 목숨을 부지하는 일 이외에 손을 쓸 수 없었던 그 엄청난 물들의 반란.
 늘 그런 식이지. 행복만은 없는 거야. 오로지 아름다움만도. 찬란하게 아름답고 나면 꼭 그것이 뒤집어진다. 대가 없이 지나가는 일은 없다. 세상에서 가장 순한 듯이 오로지 부드럽게만 감싸안아주는게 있다면 꼭 그만큼 거칠음을 내보인다. 서로 거울처럼.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