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 16, 2012

2011 성곡미술관 내일의 작가 수상전, <김범석의 산전수전>, 성곡미술관 (2012.11.2-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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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몸이 많이 안 좋아져 여주에 있는 작은엄마 댁에서 요양을 했던 적이 있다. 앞에는 강이 흐르고 옆에는 작은 텃밭이 있는 곳이었다. 나는 시끄러운 서울에서의 일을 모두 접고 잠시 휴식의 시간을 가지면서 날마다 텃밭 열매를 돌보는 일을 했다. 방울토마토의 가지를 묶고 잎을 솎아주고, 파프리카에 효소를 뿌리고 상추의 모종을 심었다. 물을 주고 흙을 다져주고, 때가 되면 열매를 따서 식탁에 올렸다. 특별할 것 없던 어느 날. 한번은 해를 받고 쑥쑥 자라고 있는 초록잎을 보다 갑자기 울컥하고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물을 주면 자라고 열매를 맺고 제 열매를 다하면 다음해를 준비하는 겸손함. 이렇다 할 인위 없이, 단어 자체로 스스로 흘러가는 자연을 바라보며, 그 품성에 탄복했다. 고요한 강물 앞에서, 아등바등 살아왔던 나의 모습은 정말 작고 작은 것이었다. 그때의 경험은 자연이 주는 힘, 자연이 얼마나 큰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지를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 소개할 전시는 그러한 자연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안에서 나고, 다시 그 안으로 돌아가는 자연 말이다.
해가 좋은 날, 공원의 나무와 풀들이 볕에 반짝이던, 평일 오후였다. 이번 전시는 김범석 작가의 산전수전. 2011년 성곡미술관 내일의 작가로 선정된 작가의 수상전이다. 한국화 작가로 이십 여년이 넘도록 그림을 그려온 작가는 최근 2년동안의 작업들을 선보인다. 출품작은 200호에 달하는 크기의 작품 54점과 15호 크기의 소품 470여점. 작가가 2년동안 무려 600점의 작품을 제작했다고 하니, 가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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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1층에 들어서면 작가의 일기와 같은 드로잉 수백여점이 전시되어있다. 작가는 이 작업을 하나의 과정이라고 이야기한다. 그가 작업실을 여주로 (공교롭게도 내가 자연을 담뿍 느꼈었던, 동일한 지역이다.) 옮기고 하루하루를 보낸 흔적들이다. 그가 작업실을 옮긴 것은 과감한 결심이었다고. 한 동안은 붓을 아예 잡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산이 눈에 들어왔고, 산을 바라보다, 밟다가, 그 안에서 세상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단다.

얇은 한지 위에는 거칠기도, 부드럽기도 한 여러 날들의 기록이 있다. 그가 실제로 본 것, 마음으로 본 것, 그리고 그 심상에 대한 색들, 이야기들이 하나하나 담겨있다. 1층 전시장을 빼곡하게 채운 이 작품들은 위에서 아래로, 양 옆으로 뻗어져 있다. 나는 그 사이를 지나면서 고개를 위로 치켜세우고 겹쳐진 그림들을 훑어 나갔다. 아주 느린 호흡으로 작품을 보는데, 보다 보니 먹 냄새가 진동을 한다. 먹을 갈고 그 안에 꾹꾹 풍광을 눌러 담은 작가의 노력이 향을 피워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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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가는 참 치열하게도 그림을 그려왔구나 싶다. 작업의 양이 너무도 방대해서 놀라고 성심을 다하는 태도에 또 한번 놀란다. 1층을 거쳐 2층에 있는 대형 작업들 역시 그러하다. 2층 전시실에는 작가의 작업실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구성이 관객을 맞이한다. 작가가 직접 쓰던 화구들, 노트, 메모가 한 귀퉁이에 자리하고, 작업실 대벽을 이루던 나무화판이 옮겨져 그 위에 작품이 설치되어있다. 가만 보자 하니 화판 위에 작가의 끄적거림이 인상적이다. “작업이 살길이다.”, “너 자신을 알라.”, “너 자신이 되어라…” 작업을 하며 스스로 적고 매일 같이 바라보았을 문구들에서 작가의 마음가짐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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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작업들을 바라보면 여러 겹으로 중첩된 화면을 볼 수 있다. 작가는 먹을 얹힌 자리에 또 다시 먹을 얹히고, 호분을 이용하여 그렸던 자리를 아예 덮어버리기도 하는 등, 점차 화면을 쌓아나간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중첩되는 풍경은 단순한 장면으로서의 산이라기보다 기억의 중첩이자 역사의 중첩, 긴 시간 동안의 중첩이다. 그리하여 작품을 바라보면 단순한 산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있는 모든 것들이 보이게 되는 것이다. 작가는 흙 부스러기가 그리고 싶었다고 했다. 그런 까닭일까 그림 속에 온통 흙이 버석거린다. 풀잎 위에 나무, 나무 위에 산 그 안에 물, 아이들, 집, 그 모든 것들이 하나가 되어 그림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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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석 작가의 그림은 그저 보고 느끼면 되는 그림이다. 어렵고 복잡한 상징체계들을 떠나서 있는 그대로를 느끼는 그림. 전시를 보다 보면 속이 뻥 뚫리게 시원해진다. 그냥 나도 같이 산 속에 들어앉아서 아- 하고 소리 내며 가슴을 툭 터 놓고 있는 기분이다. 몇 해전 여주에서의 휴식이 떠오르기도 하고 가만가만 새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주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 몰래 읽어 본 작업노트에는 “나에게 있어서 산과 들은 생명력이 얽히는 역사다”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 자연의 역사를 치열하게 그림으로 일궈낸 작가의 노력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본다.


*위 리뷰는 뮤움에 게재되었습니다. (링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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