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 22, 2013

보이지 않아도 여전히 존재하는 것

Mayuka Yamamoto, <Sleeping Bear(night)>, 130.3 x 193.9 cm, Oil on Canvas, 2009


얼마 전 내방에 곱등이 다리 하나가 덜렁 등장했다. 의자바퀴와 책장 맨 아랫칸이 맞물리는 지점에 그것이 떡 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없는 사이, 라울이가 그놈을 잡고 이리저리 장난을 치다 그 부분을 남겨두고 간 것일테다. 처음 그것을 발견하고는 경악을 하며 소름이 돋았지만, 너무 싫어 건드리기도 싫어졌기에 '으으'하고는 모른 척을 하기 시작했다. 동생이 방에 들어오면 '저거 좀 치워줘'하고 말을 했지만 동생은 귀찮아서 내버려두었고, '라울이가 다시 장난을 놀다 치워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헛된 것이었다. 라울이는 더 이상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곱등이 다리 하나는 며칠을 내 방 의자바퀴와 책장 맨 아랫칸이 맞물리는 그 지점에서 방치되었다. 내가 그 쪽을 쳐다보면 그것이 보이기는 하였지만 워낙 눈이 가지 않는 곳인데다 손 또한 자주 닿지 않았기에, 그다지 지장은 없었다. 그 말인즉슨 내가 그것을 보려고 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보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곱등이 다리 하나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뜬금없는 타이밍에 그것이 떠올라지면 괜스레 찝찝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모른 척한다고해서, 보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의 실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에는 밤중 어두운 틈을 타 또 다른 곱등이가 나와 통통거리진 않을까 소름돋는 상상이 떠오르기도 하였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곱등이 다리 하나 치우기가 어려웠다. 그래봐야 그건 몸체의 아주 작은 일부이고 휴지에 싸서 버려버리면 그만이었지만, 그걸 휴지에 싸려고 쥐는 순간 휴지를 사이에 두고 내 손가락과 곱등이 다리 하나가 닿는 상상을 하니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예전에 집 안에 곱등이가 등장해서 부들부들 떨며 에프킬라 따위를 뿌렸더니 이게 더 미친듯이 튀어오르는 걸 본 적이 있는데 그게 나름의 트라우마가 됐다. 그 이후로 나는 정말이지 곱등이 몸통도 싫고 갈색의 바탕 위에 빗살무늬와 세세한 털들이 나 있는 곱등이 다리도 싫어졌다. 그런데,

갈색의 바탕 위에 빗살무늬와 세세한 털들을 가진, 그 곱등이 다리 하나가 내 방에 있다. 싫은 이유를 아무리 설명해봤자 거기에 놓인 곱등이 다리가 사라지진 않는다. 상황이 발생한 이후로는 상황에 대한 신속한 처리가 필요하지, 내가 그것이 왜 싫은지에 관한 논의는 필요치 않다. 모른 척하고 싶어도 실체는 언제나 그곳에 존재하며 타인은 그것의 실체에 관심이 없다. 허나,

비단 <곱등이 다리 하나>만 그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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