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 6, 2013

읽고 생각하기



'자본주의 아래서 노동은 지루하며, 따라서 탈출을 시도하게 만들지만, 바로 그 지루함 때문에 진정한 탈출, 즉 '진정한 문화'에 대한 요구를 위한 에너지는 거의 남아 있지 않게 된다. 대신 사람들은 대중 음악과 같은 형식 내에서 피난처를 찾는다. 대중 음악 소비는 항상 수동적이고 끊임없이 반복되며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한다. '진지한' 음악은 상상의 즐거움을 안겨 주며 다다를 가능성이 있는 미지의 세계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대중 음악은 사무실이나 공장에서의 삶과 '비생산적인 상관관계'를 맺고 있다. 노동의 '긴장과 지루함'은 사람들이 여가 시간에도 '노력을 기울이지 않도록' 만든다. 사람들은 노동 시간에는 '새로움'을 거부당하고, 또 여가 시간에 새것을 찾기에는 너무나 지쳐'자극을 갈망'한다. 대중음악이 이 갈망을 채워주는 것이다.' - 아도르노

과거에 비해 노동의 강도는 점차 줄어든 것이 사실이나, 여전히 노동은 (대부분) 고되고 지루한 것으로 여겨진다. 휴일 전날의 금요일밤은 '자극을 향한 갈망'으로 넘쳐나고 월요일엔 이것이 다시 억눌린다. 그만큼 많은 종류의 노동이 사람을 지치게 하는 것만 같다.

학부 때 그림을 그리고, 또 여러형태의 전시를 보고 처음 그에 관련한 이론들을 배우며 가장 많이 들었던 생각은 '주말이면 삼청동에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으러 다니는 사람들이, 맛집을 찾고 데이트를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고 거리가 북적이는데, 어째 전시장엔 사람이 없고 한적한걸까? 전시는 결코 지루하지 않은 것 같은데 왜 사람들은 전시장을 찾지 않을까?'였다. 

이후 졸업을 하고 곧바로 디자인 회사를 다니며, 그리고 옷과 관련된 일을 하느라 두 가지 일을 병행하면서, 나는 일에 많이 치인다, 지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때의 여가는 단순했다. 맛있는 음식점에 가서 맛있는 걸 먹고 예능프로를 보고 쇼핑을 했다. 책을 별로 읽지 않았던 것 같고 전시장을 잘 찾지 않았다. 나머지 시간에 쏟을 에너지가 없었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쉬고 싶었다. 쉰다는 것은 능동적인 태도가 아닌 지극히 수동적인 태도로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소비하는 것'이었다. 그건 쉬운 일이었고 무겁지 않았고 많은 에너지를 요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아주 적절했다.

위 아도르노의 이론은 반박의 여지도 많지만 '(대개) 지루하게 여겨지는 노동'이 여가에 대한 노력을 상쇄시킨다는 점에서는 매우 공감하는 바이다. 이는 아마도 학생의 신분에서 일을 하는 노동자로의 변화, 그리고 여가를 대하는 태도의 변화를 몸으로 겪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면 다시 처음의 생각으로 돌아간다. 

일에 지쳤을 땐 여가에 수동적인 태도를 갖게된다. 그럼 내가 했던 생각으로 돌아와 전시를 예로 들었을 때, 전시장에 상대적으로 사람이 적은 것은, 전시장을 찾는 것이 많은 에너지를 요구하기 때문일까? (물론 모든 전시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정말 단순하게 생각하면, 최근의 팀버튼전이나 인상파전시 같은 것들이 흥행한 것은 그것들이 에너지를 적게 요구하기 때문일까? (특정전시 비하 아님)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친숙한 명화나 유명작품이 아닌 현대미술전시는 왜 어렵게 느껴지고 사람들이게서 멀어질까? 왜 작품을 마주하는 것은 감상보다 해석과 분석이 먼저인 것처럼 되었을까? 그럼 대중에게서 멀어지는 전시는 '좋지 않은 전시'라고 해야할까? '좋은 전시'는 무엇일까? 

자극이 넘실거리는 시대에서 글도 그림도 음악도 영화도 어지간해서는 주목받기가 어려워졌다. 수 없이 지나가는 이미지와 정보사이에서 주목을 받는다는 것은 명예로운 '간택'과도 같이 느껴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모든 이야기들에도 예외사례들은 존재한다. 자극적이지 않아도 찾게되는 것들, 혹은 마이너적인 성향이 강하더라도 더욱 찾게되는 것들, 혹은 그 외 기타 등등.

그것들엔 알 수 없는 코드가 숨겨져 있는 듯 하다. 나는 내가 준비하고 있는 일들이 그러한 코드를 관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것에 <관찰>이 중요한 키워드가 되어 주었으면하고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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